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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게아저씨

어느 시골에 가구수도 몇안되는 마을에 한 누렁이가 살았습니다. 몸집은 크지 않았고 그렇게 사납게도 생기지 않은 누런 털을 가진 개입니다. 드문드문 탈이 빠진 것으로 봐서는 꽤 오랜 살아온 듯싶습니다.항상 철문옆에 낡은 개집은 빈밥그릇에 노니는 파리 몇 마리뿐 이고, 개집 앞에 길게 누워 턱을 땅에 꿰고 반쯤 감은눈을 한 채 햇살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후 한나절을 움직임이 없이 누워있는 이 누렁이는 마치 밭일이 싫어 서울로 도망간 막내아들모양인 양 마당에 누워 자는 듯 깬 듯 있습니다.만사가 귀찮은 듯 누워 있다가도 주인네 식사시간에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마루 끝에 서서 입맛을 다십니다그러다 고깃덩어리 한 조각이라도 던져주지 않으면 덧마루에 뒷발질로 먼지를 일으키며 자기의 자리로 가서 아무 일도..

이천 년 전에는 겸손이 미덕이 아니었다고 하니 허풍과 교만이 득세를 하여 옆에 사람의 마음 다침이나, 화남을 이해하지 않고 안하무인격에 빤질거림만이 넘치는 시대였나 생각이 들지만 어느 면에서는 강직하고 곧은 기개가 넘치는 사람들이 살던 시대였기에겸손은 패배자나 나약한 자들이 가지는 비굴한 제스처였기에 겸손한 마음은 덕목이 아니었나 봅니다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속성인 가식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강자의 겸손은 존중의 의미가 담겼고, 약자의 너그러움은 비웃음 그 자체였습니다.작금의 시대는 겸손이 상실된 무대보에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말하고 행동한 이보다 옆에서 보거나 듣는 이가 더욱 부끄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일단 내질러보고 아니다 싶으면 발뺌을 하는 요즘을 보고 있다면 화병이 생기는 ..

당신이 신앙인이라면 매일 기도를 하고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참석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가질 것입니다. 세상은 질문합니다."당신은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종교인입니까"라고 말입니다.불교에서 믿음은 자신을 희생하고 낮추고, 버림으로 덕을 쌓고 그 덕이 윤회를 걸쳐 반드시 나타난다고 합니다. 허지만 절대로 이승에서 행한 악덕은 어떤 형태로든 간에 대가를 받고 이승을 떠난다고 가르칩니다.평생을 머슴살이를 하며 모은 재산을 절 재건축에 시주한 어느 머슴이 전재산을 시주하고 갈 곳이 없어 그 절에서 숙식을 해결하다가 중풍에 걸리고 ,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여 실명을 하고 갖은 고생을 하며, 병에 시달리다가 호랑이에게 물러가 생을 마감하는 일이 벌어지자, 주변에 사람들은 부처님의 공덕을 의심하고, 부처님 대신한..

언제부터인가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어릴 적으로 회귀하듯이 , 아침부터 쉼 없이 뿜어내던 엄마의 억척스러운 잔소리를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려버렸던 날들이 늘어나고, 찍소리도 못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불쌍한 사내다.어느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가 엄마같이 느껴지지 않느냐는 질문에 동의하는 나에 비해 , 동의치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김없이 이들은 눈치가 없는 인간이거나,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던 분류인 것이 틀림없다. 이런 인간은 티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뜨거운 티를 엄지와 검지 그리고 장지를 곱게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티잔을 받치고 호호 불지도 않고 아주 조금씩 마시는 모습이 얄미움을 더해 밉살스럽기까지 하다. 나와 같은 분류는 ..

영장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500만 년 전에 채집생활로 채식만 했다고 합니다.그러다 250만 년 전 육식을 하기 시작하였고, 200만 년 전 불을 우연히 사용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시대가 도래하면 맛을 내는 방법을 나름대로 찾았고, 100만 년 전에는 인간들이 집단거주를 하면서 외부의 침입이나 자연재해를 공동 대처하는 지혜가 생기고 같이 먹고 나누는 농경사회가 형성되며, 차츰 계급이 생기고, 각자의 또 다른 경쟁세력들이 생기면서 단합의 목적과 색깔을 동질화하는 이유에서인지 한상에 음식을 차려 같은 것을 먹는 동질감을 느끼는 먹거리로 표출되고, 각자의 족장을 중심으로 잔치라는 이름으로 자리매김하여 , 각집안마다 특색 있는 음식문화를 특정 짓는 계급사회로 가져온듯싶다.먹는다는 것은 정..

몸이 허해진 탓일까 꿈이 많다. 너무도 맑은 물이 건물을 둘러싸여 있다 처음에는 나지막한 물인지 알았는데 열 척이 넘는 깊은 물인데 , 바닥이 다 보인다. 이가 시리도록 맑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저 멀리 둑이 보인다 그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에 뛰어든다 아참! 난 수영을 못하는데 할 순간 너무도 수영을 잘한다. 그 먼 거리를 팔을 두어 번 저으니 도착했다. 그래 꿈이니깐.반가운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4살이나 5살 사내아이가 옆에 서 있다 반가운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고 이 사내아이는 또 누구인가 그러나 친근감은 있다. 시골스러운 다운타운을 사내아이 손을 잡고 반가운 여인의 뒤를 쫓아 걸고 있다. 아는듯한 길 풍경인데 어딘지는 모르겠다. 옛날 70년대 수유..

여기는 국제공항이다 우리네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읍내 시외버스 터미널도 국제공항으로 불려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읍내버스터미널에는 스타벅스 커피샾이 없는데 여기는 있다는 것과 이곳 기념품으로 컵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까. 터미널이나 공항은 바람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경제창출이라는 요소를 만드는 곳이기에 여행객의 눈을 현혹하는 돈 쓸 것이 많다는 것이다. 오는 자들은 호기심으로 가는 자는 의미를 부여키 위해 선물을 사고 또 산다. 집으로 가면 두 번 이상 써보지도 만져보지도 않을 기념품을 말이다.. 그렇지 여행은 사진과 기념품만이 추억을 얘기해 주는 법이기에 알지만 사고 또 산다. 선물할 곳도 없으면서 아직 이쁜 것에 대한 욕심이 있..

일주일에 한 번씩 재활용과 음식물들 쓰레기를 치워가는 날이 있다.우리는 화요일 아침 7시다. 전날인 월요일에 길가에 쓰레기통을 내놓는다. 뚜껑이 앞쪽으로 열리게 하여 recycle통과 garbage통사이를 일정가격 벌려 놓아야 쓰레기를 수거해 간다. 뚜껑이 안 닫친 garbage는 안 가져간다. 물론 통 안에 안 넣은 쓰레기도 안 가져간다.처음에 모르고 통을 가지런히 붙여 놓았더니 아주 친절하게 안 가져갔다. 전화해서 쓰레기를 안 치워갔다 하니 붙여놓았거나, 통밖에 넣은 것 등은 수거해 가지 않는다고 5분을 넘게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우리 민족은 과잉친절에는 화가 나는 민족인지 아님 내가 화가 많은 탓인지 울화가 난다. 또 쓰레기통을 일요일에 내놓으면 아주 동네에 아주 오래 산 친절한 할머니가 ..

여행은 떠나기 전에 설렘이 소풍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게 되는 어릴 적 기억을 가슴으로 소환한다.비행기를 예약하는 한 달 전에는 여행하는 날이 올 것 같지 않은 먼 미래같이 느껴졌고, 큰 기대감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사실 여행의 즐거움이 그리 가슴에 와닿기보다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실이 더 절실하여 여행을 생각해보지도 못한 이민자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쉬지 않고 달리는 마라토너가 결승점을 앞둔 듯, 출발할 날이 코앞에 다가와 황급히 짐을 싼다. 뭐부터 싸야 할까 하고 잠시 고민한다. 집을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편을 자초하는 것인데, 그 불편함 울 갖지 않으려는 어리석음이 있다. 그러다 보니 짐이 너무 많다. 세련되지 못한 행위다. 미리 준비치 않은 탓일까? 섬이니 해변이 있을 것이고, 수영복과 반팔..

언제가 부터 나는 달빛을 피하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방에 전기를 밝히고,밤길을 걸을때는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걸었고, 하늘을 쳐다보며 달을 보기보다 길옆에 가로등을 더 많이 보았다. 이제 달빛은 토끼가 ,계수나무가, 라는식의 낭만을 잃었고 그냥 밤하늘에 있는 달이다. 창문에 커텐을 달았다. 참 이상하다 . 침대옆에 보조등을 키고 잠을 청하는 날이 많으면서 그윽하게 날마다 변화는 달빛은 커텐에 가두워 버린다.달빛은 하늘 어느곳에 묻어버린채 어둠을 칠흙같이 만들고는 그믐달이란 이름으로 세상을 침묵속에 담그더니 그비밀을 잠금해제하듯이 은은한 스킨쉽으로 온몸을 만진다. 차가운 혓바닥이 목젖을 스치듯이 온몸에 소름이 돋고,이제는 나를 껴안듯이 내창 가득히 쏟아낸 달빛을 나는 거부한다.달빛을 따라 걷던..